-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작가, 고향 구례와 문학·가족·공동체 이야기 나눠
- 차·전통음악·문학 어우러진 산사 인문 프로그램…체류형 인문문화 여행으로 확장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지리산대화엄사(주지 우석스님)는 지난 22일 오후 7시 30분부터 9시까지 화엄사 경내에서 여름밤 인문 프로그램 ‘화야몽(華夜夢)’ 두 번째 시간을 마련하고 구례 출신 소설가 정지아 작가와의 만남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올해 화야몽의 주제는 ‘지리산 바람이 지나고, 별빛 아래 차 한 잔’이다. 지난 7월 덕제스님의 ‘차의 세계’에 이어 열린 이번 프로그램에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한국 문단과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 정지아 작가가 초청됐다.
정지아 작가는 고향 구례의 화엄사를 찾아 자신의 삶과 문학, 가족과 역사,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냈다.
이날 강연은 작품에 대한 해설을 넘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잘 사는 삶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서로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생각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정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최근 선보인 ‘찌니주의보’의 뿌리에 모두 구례와 구례 사람들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부모와 부모 세대가 평생 함께 살아온 구례 사람들의 삶이, ‘찌니주의보’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나온 구례 사람들의 삶과 관계가 중요한 모티브로 녹아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정 작가는 서울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다시 구례로 내려온 이후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기준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학벌과 직업, 사회적 성공과 외형적 조건을 중심으로 사람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구례 사람들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사람마다 저마다의 쓸모와 역할이 있으며 삶의 가치는 서열로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정 작가는 이날 ‘관계를 잘 맺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을 전하며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들려준 구례의 공동체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텃밭에서 키운 호박 하나와 깻잎 한 장, 장아찌 한 통을 이웃에게 건네고 누군가 어려움을 겪을 때 밥 한 끼를 함께 나누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나눔이 오랜 시간 쌓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정 작가는 설명했다. 때로는 다투고 서운해하면서도 서로의 끼니를 챙기고 힘든 일이 생기면 이웃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자신이 구례에서 다시 발견한 공동체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날 참석자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 이야기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인물의 모델이 된 ‘떡집 언니’에 관한 일화였다.
정 작가는 팔순을 맞아 자신이 축하받기보다 자녀와 친척, 친구들에게 먼저 밥을 사며 “오늘까지 함께 있어줘 고맙다”고 말했던 한 평범한 구례 사람의 삶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화려한 성공보다 감사하며 살아가고 주변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는 마음이 더 아름답고 위대한 삶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정 작가는 자신 역시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공한 삶’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자신이 살아온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의 삶을 따뜻하게 만들고 한 사람에게라도 힘이 되어주는 것이 더 깊고 값진 삶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정 작가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일상도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전해져 누군가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며 한 사람의 생애 자체가 한 편의 문학작품 못지않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함께 정지아 작가의 신작 ‘찌니주의보’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서 펼쳐지는 3일간의 시간을 통해 가족의 기억과 한국 현대사의 상처, 이념 너머의 인간을 바라본 작품이라면, ‘찌니주의보’는 오늘의 농촌 공동체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삶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갈등과 오해, 이해와 공존을 이야기한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역시 ‘사람’과 ‘관계’다. 이념과 세대, 학력과 직업,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르더라도 한 사람의 지나온 시간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편견이 무너지고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정지아 문학이 이날 화엄사의 밤에 던진 질문이었다.
정지아 작가와의 만남에 앞서서는 구례향제 줄풍류 식전공연도 펼쳐졌다. 대금 이소정과 가야금 장하연의 단아한 선율이 화엄사의 여름밤을 열었으며, 천년고찰의 고요와 지리산의 바람, 전통음악과 문학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며 참가자들에게 특별한 산사 인문 체험을 선사했다.
화엄사 주지 우석스님은 “화엄사의 여름밤은 지리산의 바람과 별빛, 천년고찰의 고요가 함께 머무는 특별한 시간”이라며 “오늘 정지아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화엄이란 서로 다른 존재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 가르침”이라며 “한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가족과 이웃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마음 또한 자비이자 화엄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우석스님은 “오늘 이 시간이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삶과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는 작은 등불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화엄사 홍보기획위원장 성기홍은 “오늘 정지아 작가의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는 이야기였다”며 “호박 하나, 깻잎 한 장을 나누며 맺어진 인연이 수십 년 쌓여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이야기는 구례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인문적 자산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찌니주의보’는 구례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그 안에 담긴 가족과 이웃, 이해와 환대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생각해야 할 보편적인 질문”이라며 “정지아 작가의 문학과 천년고찰 화엄사의 공간이 만난 오늘의 화야몽은 불교가 종교의 울타리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과 예술, 인문정신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자리”라고 평가했다.
화엄사는 앞으로 화야몽을 단순한 사찰 문화행사를 넘어 사람들이 머물고, 걷고, 듣고, 사유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산사형 인문문화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특히 행사 다음 날 연기암 ‘어머니의 길’을 걸으며 지리산의 아침을 만나고 구례의 산나물 음식과 지역문화를 경험하는 프로그램 등을 연계해 화엄사를 중심으로 1박 2일 또는 2박 3일 체류형 인문문화 여행으로 확장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화엄사는 화야몽을 통해 천년고찰의 밤이라는 공간적 자산에 차와 전통음악, 문학과 사유를 결합하며 기존 사찰 문화행사와 차별화된 야간 인문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를 넘어 문화로, 관람을 넘어 체류와 사유로 이어지는 화엄사의 ‘화야몽’이 지리산의 자연과 천년고찰의 공간을 기반으로 지역의 문학·문화자원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사형 인문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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